마지막 편지

마지막 편지

 여행마치며 제게 주셨던 호텔 메모지에 쓰인 7장의 편지

30년전에는 펙케지 투어의 일정이 길었다.

유럽에 나오기 쉽지 않은 때여서 한번 여행을 나오면 21 일정 이나 18 일정의 투어를 해야했었고 나라마다 가이드가 없던 시절이여서 로마에서 나간  사람의 가이드가 이태리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네델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를  가이드 해야만 했었다.

한식당도 흔치 않았고 네비게이션도 없던 때라 지도 한장 가지고 식당도 찾아가고 유적지도 찾아 가야만 했다. 유능한 운전기사를 만나면 행운이지만 초짜나 곤조(?) 부리는 기사를 만나면 참으로 어려운 여행을 하곤 했다.

한번은 한국의 제법 이름있는 H 여행사의 펙케지 투어로 18 인원 단체였다. 로마에서 3 후에 피렌체에서 1 베니스에서 1 인스브르크에서 1 그리고 리히텐쉬타인 이라는 작은 나라를 거쳐서 쥬리히에서 1 이렇게 올라가면서 벨기에까지 도달했을땐 이미 열흘이 훌쩍 넘어 거의 2주째가 되어 갔다.

손님들이 좋아 저녁마다 일정을 마치고 야밤에도 호텔을 빠져나가 야경을 즐기고 누가 손님인지 누가 가이드인지 가이드와 손님이 모두 뜻이 맞아 밤참 즐기고 야식 찾아 헤메고 좋았다.

 좋아하는 손님은 맥주집이며 와인집을 뒤지며 유럽의 밤은  이리 짧냐고 아침이면 늦장이다. 그도 그럴것이 여름철 네델란드는 12시가 되어도 밤거리가 환해서 시간을 모른다.

며칠을 손님들과 즐기다 보니  친해져서  가족처럼 되어 버렸고 손님들의 성향도 파악 되어서 서로가 어색함 없이 가까워 졌는데 손님들은 40대가 평균 나이인데 그중에 유독 앞자리를 차지하고 어른 대접을 혼자 독차지 하던 제법 부유하게 보이는 60  (당시 필자는 29) 할머니가  흥겨운 분이셨다.

친구도 없이 혼자 오신 분이 저녁에 술값 내겠다고 모두 몰고 나간  타자이기도 했고 버스 안에 나오는 팝송들은 모르는 노래 없이 따라 불렀고  세련됨과 멋스러움, 크게 배푸시는 모습등이 나도 나이들면 저렇게 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정도로 명랑, 쾌활 하며 분위기 메이커로 언제나 환영받는 할머니였다.

일정이 마쳐져 가는 종반 즈음에 파리일정을 앞두고 벨기에 브루셀에서  단체와 마지막 저녁을 하게 되었고 그동안의 여행이 즐거웠다고 인사들을 주고 받으며 저녁 식사후 파티를 마치고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명랑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우고는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네며  봉투는 우리와 헤어진 후에 보세요.  우리를 떠난 후에 열어 보세요! ” 하는 것이 였다.

궁금도 하지만 피곤도 했기에 봉투를 가방에 받아 넣고는 방에 들어와 잠을 자고 부루셀에서 아침에 출발해서 정오쯤 파리 콩코드 광장 앞에서 파리 가이드에게 단체를 버스채 모두 인계 해주고 로마로 내려가려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야간에 밤새달려 밀라노를 경유 로마로 가는 밤기차였다.

무료한 기차에서 피곤을 삭히며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이고 있다가 전날  손님이 전해준 봉투가 생각이 났다.

급히 봉투를 꺼내보니 호텔 메모지에다 앞뒤를 빼곡히  내려간 7장이나 되는 편지였다. 잠도 오지 않고 내용도 궁금한 터라 편지를 꺼내 읽어 내려가는데 한장 두장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용을 돌이켜보면 이분의 남편은 한국의 유명한 건축회사 중역이셨고 중동 건설 붐으로 출장을 자주 다녔고 출장지에서 돌아 오면 유럽 각국에서 사온 선물로 위로하며 은퇴하면  같이 여행 하자고 대학시절부터 다짐하고 약속했던 그현장들을 이분은 꿈꾸며 기다려 왔었다고 한다,

트레비분수에 동전도 던져보고 상제리제 거리도 함께 걷고 알레봉골레 스파게티며 에스카르고에 모짜렐라 어니언 수프를 같이 먹자고 약속했단다.

그런데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49제를 마치고 나니 남편없는 세상에  다리로 일어서 버틸 자신이 없어 인생을 마감하려고 준비했었다고 한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남편과 했던 약속이 떠올라 남편과 같이 가보자고 했던 유럽 여행을 해보고 죽으려 했단다.

그래서 이여행을 선택했고 죽음을 압둔 여행이였기에 기왕이면 남들보다 명랑하게 남들을 기분 좋게 해주며 돈도  써가면서 여행하려고 했단다.   그렇게 술을 먹고 남들 앞에서 춤을  이유도 우울했던 분위기를 떨쳐보려고 노력한 최후의 몸짖이였단다. 같이 여행온분들에게 우울한 자기의 분위기를 전가되게 하기 싫어 팝송도 따라 불렀단다.

그리고  여러장의 메모지 끝에 마지막 글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죽으려고 준비하고 나온 이여행 길에서 아들같은 청년이 가이드로 나와서 힘든 유럽 땅을 뛰어다니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남겨 두고온 외아들이 생각났는데  아들이 자기가 떠난 후에 세상을 저렇게 열심히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자기 모습을 반성하면서 이제는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 갈께요.. 라고 글을 마쳤다..

글을 읽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없어 하염없이 달리는 차창밖을 그저 물끄러미 내다 보며 유럽의 기차소리에 나의 흐느낌을 실어 흘려 보냈다.